자료실

[제20회 농민주일] 강론자료_성인용

가톨릭농민회 2015. 7. 17. 17:16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말로 쓴 농민주일 강론자료입니다.

어린이부청소년부일반부 미사용으로 나누었으며, 천천히 읽으면 10~15분 남짓이 될 수 있도록 썼습니다. 강론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강론자료.hwp

 

 

 

 

 

결국 도시는 농촌 없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교회가 인류의 생명을 길러내는데 한 생을 바치고 살아가는 농민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도시민들의 외면과 무관심, 그리고 탐욕으로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 가는 농촌의 현실에 경각심을 갖고, 늦기 전에 되살리는 데 앞장설 것을 촉구하는 20번째 농민주일입니다.

 

어쩌면 농민주일은 우리에게 아주 낯선 주일로 다가오는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도시에 거주하는 신자로서는 농민과 농촌의 현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한 바가 없는 이상 어떤 글과 말도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농촌은 도시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도시는 농촌의 도움 없이는 단 1주일도 버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전쟁과 대규모의 자연재해가 아니고서도 농촌으로부터 단절된 도시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물 등 지금껏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더더구나 도시의 휘황찬란하며 세련되기 그지없는 문명이라는 것도 생명을 길러내는 농민들의 노고가 없이는 사상누각일 따름입니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가는 도시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현대의 병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신 자연과의 단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은 농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당신의 첫 사목교서인 복음의 기쁨48항에서 우리는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혀야 합니다. 결코 가난한 이들을 저버리지 맙시다.”라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의 문제는 2천 년 전 우리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편으로는 걸림돌이며, 또 한편으로는 주춧돌입니다. 곧 가난한 이들의 문제를 외면하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마태 5.48 참조) 우리 시대에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 현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 중 농민만큼 억울하게 가난한 사람도 없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나태함이나 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도시민의 탐욕으로 인해 가난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정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10, 20년이 지나도록 오르지 않는 쌀값, 이른 새벽 논과 밭으로 나가 농작물을 살피다 저녁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그들의 연봉이 겨우 평균 천만 원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 원인을 마치 자신의 문제인 양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육신을 혹사해 가며 이룬 것이 헐값에 거래돼도 버텨내는 그 뚝심에는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들의 가난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서는 지속 가능한 세상도, 그리스도의 복음 핵심도 우리는 끝내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도시민은 소비자가 아니며, 농민은 생산자가 아닙니다!

 

현대의 자본주의 문명을 이루는데 한 획을 그은 애덤 스미스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작 국부론에서 우리가 우리의 저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도축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필요가 아니라 탐욕에 의해서 사람이 움직인다는 그의 생각은 어쩌면 한편으로는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살려내는 먹을거리를 두고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가톨릭농민회 정신에 따라 사서 고생하는 유기농의 길로 접어든 가톨릭 농민을 두고서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고약한 말입니다. 또한 그 이전에 하느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넘어서 선의 가치를 믿는 우리 도시의 신앙인으로서도 모욕적인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농민은 돈을 벌기 위해 생산을 하고, 도시민은 돈을 지급하였기에 당연히 소비할 권한을 가진다는 가정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존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신성모독의 표현이라고까지 하겠습니다.

 

분명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 죄인은 단순히 해서라기보다는 해서 죄인입니다. 때론 탐욕과 이기심이 우리를 사로잡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공동선을 지향하며 상생할 수 있는 사랑의 연대를 끊임없이 지향하는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만약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농작물을 생산한다고 스스로 여겼다면 우리 가톨릭 농민은 일찌감치 친환경농사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도 돈만을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 방법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 한 통의 농약과 제초제로 해결될 문제를 마다하고 이 계절, 풀을 베고 돌아서면 또 자라나는 풀을 베기 위해 다음날 어김없이 허리를 구부려 온종일 뙤약볕 아래 쪼그려 앉는 농민의 마음은 결코 그렇고 그런 생산자의 마음이 아닙니다.

 

또한 이미 이런 희생적인 농민의 마음을 알아챈 일부 신앙인이 우리농촌살리기운동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더 다양하고 때깔이 좋은 농산물이 갖춰진 대형할인점을 마다하고 우리농매장을 찾아 어렵게 가톨릭 농민의 유기농 농산물을 구매하려 발품을 파는 것은 결코 소비자의 마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암울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소비자로, 또 상대를 생산자로 여기는 경제적인 관념은 우리농촌살리기운동에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은 도시와 농촌의 신앙인이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고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판단 이전에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올곧은 신앙고백을 위하여 자연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존중하면서 마침내 도시의 신앙인이 참되게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생명살림이인 농민과 생명지킴이인 도시민의 거룩한 연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도시 안팎으로 귀농해야 합니다!

 

건강은 결코 병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 우리의 고귀한 생명이 그 활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심신이 온전히 행복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초라한 우리의 현대적인 삶은 그저 병이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이를 가리켜 건강한 삶이라 말합니다. 낙원에서 쫓겨난 인류가 그나마 다행히도 그 태초의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한 채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든 나날이 오늘날 이 도시에서도 매일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삶은 만만치가 않을 뿐 아니라 진정한 건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제대로 된 길목을 발견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보다 암울하고 참담한 예견이 가득한 시대입니다.

 

그 원인을 우리는 먼저 신앙 안에서, 이어서 우리농촌살리기운동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로마박해의 시기를 거치고 자유를 획득한 안정적인 시대에 도리어 혹독한 사막을 찾은 교부를 기억합니다. 그보다 앞서 맞바람이 불고 파도에 시달릴지언정 안전한 배 안에 머물기보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물 위를 걷기를 믿음으로 감행한 베드로의 용기를 기억합니다.(마태 14.22 이하 참조) 또 그보다 앞서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광야생활을 감내한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 그들 모두는 결국 광야에서 답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안전하고 편한, 새로운 변화를 꺼리는 만들어진 본능을 거슬러 낯선 곳으로 진입하여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또 그래서 이루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농촌은 도시민으로서는 낯선 곳입니다. 위험하고 비위생적이며 지루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두 고향인 농촌에서 출발하였건만 그곳이 두려워지고 불편하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현대의 병을 포함한 우리의 많은 문제는 고향을 상실하고 창조세계를 거부하면서부터 깊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진실로 행복하고 완전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이 창조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농촌과 농민의 생태적 감수성을 배워 익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외로 나들이를 가고 산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농민은 따로 육체적 건강을 위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노동을 하면서 그 생태적 감수성을 충전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런 생태적 노동에 동참할 때 참된 건강을 회복할 길을 알아채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직접적인 귀농일 수도 있고, 또 한편 도시에서의 텃밭 가꾸기와 주말농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어 농촌일손돕기를 떠나 심신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도시의 삶 속에서도 본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신앙의 광야를 굳이 찾아 떠났던 성인들의 삶을 본받아 하다못해 상자 텃밭이라도 가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시 안에서의 귀농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통해 마련될 것입니다. 우리농매장을 통해 깨끗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그것을 통해 농촌과 농민의 가치를 읽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도시에서건 농촌에서건 귀농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오늘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어린 양들을 잘 돌보십시오!

 

이 말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요한 21.15 이하 참조) 그리고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 특별히 신앙인에게도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듯이,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 미래세대에게 짐을 부과하지 않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는 것은 인류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생 인류는 창조세계에 대한 폭력으로 심각한 환경적 재난에 가까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로써 미래세대는 그 첫 출발점에서부터 현세대보다 불리하고 위험한 환경을 물려받을 위험이 커졌습니다. 마치 세상 종말을 자신의 힘으로 앞당기려는 어리석은 발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심각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 속에 우리 재생의 길이 완전히 막혔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통한 농촌의 관심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한중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타결 여부와 지난 20년간 유예해 온 쌀 시장에 대한 전면개방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미 세계화가 된 판국에 안으로 문을 닫아건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고 되물을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단적인 예를 들면 모두 즐겨 먹는 매운 청양고추 종자는 IMF 외환위기를 거치고서는 유전자조작농산물 생산으로 성장한 거대 종자기업 몬산토의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개발되고 재배되던 이 청양고추 종자는 이제 중국의 산둥성에서 채종되어 국내 농민에게 로얄티를 받고 팔리고 있습니다. 또 한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주식인 벼농사가 1978년 냉해를 입은데 이어 1980년에 또다시 냉해로 대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장 쌀이 부족해진 정부는 쌀 수입을 모색했지만, 흉년으로 한국에 쌀이 부족한 것이 알려지고서는 국제 쌀 시세가 급등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세 배 가까운 가격에, 거기다 이듬해 농사가 잘되어 넉넉하더라도 쌀을 추가로 수입하겠다는 조건으로 당장 급한 쌀을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재수 없는 한 예에 불과할까요? 그저 한 예에 불과하지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고, 우리 미래세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2012년 현재 식량자급률이 23.6%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현실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업식 농업이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기업농으로 규모를 키워 농사를 지음으로써 발생하는 농약화학비료제초제 오염, 유전자조작농산물 위험뿐만 아니라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농사를 짓지 않고 수입하여 식량주권을 포기하는 문제까지 발생하고 말 것입니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조차 가족농업주의는 무너져서는 절대 안 되는 중요한 우리 농업의 축이라고 할 정도로 전 세계 식량 생산의 20%가량을 가족농을 통해서 공급받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대규모가 아닌 소규모, 기업농이 아닌 가족농을 통해 풀어야 합니다. 더더구나 2014년은 UN이 정한 가족농업의 해’(International Year of Family Farming, IYFF)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첨단을 달리고 있는 현대에 가족농업의 가치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참으로 모순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의 미래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구체화한다면 친환경적인 생명농업을 지향하는 가족농업이 우리의 대안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농민주일의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이미 우리를 앞서간 농민과 도시민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여곡절도 있었고, 부족함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노력이 엮여 이제는 20년의 역사를 일구어낸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 있습니다. 또한, 그 곁에는 그보다 앞서 48년 전부터 농촌과 농민을 지켜온 가톨릭농민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의 보배인 이들을 통해 시대를 거슬러 올바른 생명지킴이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모두 우리농촌살리기 위한 교회의 노고를 본받아 구체적으로 일부러라도 우리농매장을 이용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안에 새겨진 창조의 신비로움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