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주일 기념강연] “생명농업,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권혁주 주교)
제20회 농민주일 기념 강연회(15/07/17)
“생명농업,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권혁주 주교(안동교구 교구장)
도입 - 알묘조장(揠苗助長)의 비유
「孟子」의 ‘공손추’편에 나오는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는 고사 성어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을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송나라 사람 중에 자기가 심은 곡식 묘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묘를 뽑아 올린 사람이 있었다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에게 “오늘은 피곤하구나.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거든” 하고 말했다네. 그의 아들이 뛰어가 보았더니 싹은 이미 말라 버렸다고 하더군.>(「孟子」의 ‘공손추’편)
맹자는 천하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많음을 개탄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총명하다 여기지만 자연의 법칙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제멋대로 싹을 뽑아 올리고 결국 말라죽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가운데도 절묘하고 적절한 비유가 있는데, 맹자의 알묘조장과는 대비를 이룹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우리 농촌에도 이러한 현상이 가끔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농촌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려 합니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본래의 농촌 모습을 많이 일그러뜨리며 때로는 알아볼 수 없게까지 합니다. 농촌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돈이 되는 이러한 개발과 발전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농촌의 진정한 개발과 발전은 농촌을 자연 그대로 살리고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억지로 살리고 가꾸고 돌보는 알묘조장(揠苗助長)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자연의 순리대로 살리고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살리는 이러한 농법을 적용시킨 농사를 생명농업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 생명농업이란?
한국가톨릭농민회는 1990년을 기점으로 운동방향을 생명운동과 생명농업으로 바꾸었습니다.(안동 ‘생명의 공동체’ 운동 1988년부터 시작!) 생명농업은 경제개발 이후 농업 증산 정책 때문에 쓰인 화학비료나 농약으로 땅이 죽고, 죽은 먹거리가 생산되는 것을 문제로 인식한 가톨릭농민회가 ‘소득이 적더라도 살아있는 농업을 하자’고 하며 시작한 것이 ‘생명농업’입니다. 그 이후 WTO(세계무역기구)나 FTA(자유무역협정)로 인해 이 땅의 농업이 망가질 때 가톨릭농민회는 생명농업과 농산물 나눔 운동을 하며 한국농업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한국천주교회에서도 주교회의 차원에서 1994년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어려움에 처한 농촌을 살리려는 실천운동으로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시작하였고, 1995년에는 매년 7월 셋째 주일을 ‘농민주일’로 제정하여 교회 전체가 농업·농촌·농민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는 날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96년 제1회 농민주일을 시작으로, 하느님 창조사업에 꾸준히 협력하고 있는 농민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농업과 농촌의 소중함과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살아가는 생명공동체 정신을 일깨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오늘(2015년 제20회 농민주일)에 이르렀습니다. 제1회 농민주일 담화문(고 박석희 주교)은 농민주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농민주일은 단순히 농민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고 격려한다는 의미를 넘어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력하여 밥상을 살리고 우리의 생활양식을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합당하게 변화시키자는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의 목표를 달성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농민주일은 농민을 위한 주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농민과 삶을 연대하는 도시 소비자들의 주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농민회가 1990년 2월 27일 제20차 대의원대회 선언문에서 가농의 운동방향을 생명운동, 생명농업으로 바꾼 내용을 참고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오늘 우리는 한국가톨릭농민회 25년을 겸허하게 되돌아보며 농업을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생명운동, 공동체운동의 새 지평을 향해 굳건히 나아갈 것입니다. … 우리는 참 농민이 되는 것과 참 세상을 만드는 길이 하나임을 믿는다. 생명운동, 공동체운동은 바로 참 농민이 되는 길이며 위기에 처한 농업·농민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며 겨레와 인류와 전체 생태계의 생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길이며 하느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 길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을 억압, 소외, 왜곡하는 구조의 모순, 제도의 강제를 바로잡기 위한 싸움에 이 땅의 농민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구조의 모순을 지탱하고 심화시키는 토대인 반(反)생명, 반(反)공동체 문명양식을 바로 잡는 데 우리의 온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우주 생명의 하나이자 전체인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생명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중심을 단단히 세우고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농업에 충실할 것을 선언한다.
둘째, 개인, 겨레, 인류 그리고 모든 생명은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이웃과 관계를 맺고 발전시키는 현장생활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 될 수 있는 공동체 실현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생명농업”이 어떤 것인지 가톨릭농민회와 우리농촌살리기운동 본부가 함께 정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1996년 8월 20일 전국생산자위원회 제정/ 1996년 9월 23일 전국대의원총회 인준/ 2009년 12월 18일 건국 대의원총회 개정)
(1) 생명농업이란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자연의 순환원리에 맞추어 인간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함께 공생함으로써 미래 세대에도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농업이다.
(2) 생명농업은 유기순환적 공생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생명농업은 생산과정 뿐 아니라 그 결과의 유통·소비의 전 과정 또한 공생과 순환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생산과정에서부터 투입되는 물질들이 유기적으로 순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지 농약이나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축소된 의미가 아니라 생태적으로 순환이 가능한 자연 본래의 생산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즉 생산과정의 핵심은 생명의 토대인 흙을 건강하게 살아있게 함으로써 살아있는 흙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길러낸다는 것이고 이 과정이 유기순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2015년은 UN이 정한 ‘흙의 해’)
(3) 생명농업의 기준은 무농약·무화학비료의 관점이 아니다. 어떻게 유기순환구조를 구성하는가가 중요하다. 관행의 화학비료 위주의 시비를 유기물로 전환해야 한다. 토양에서 나온 농업부산물과 이를 먹이로 한 축산배설물 등을 다시 토양에 되돌려 줌으로써 농약과 화학비료를 줄여 나가야 한다.(가농소 입식지원운동 → 퇴비 자급율 증가)
(4) 동시에 현대 과학문명의 결과물 중에서도 인간과 자연환경에 피해를 가져오지 않는 것들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생산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현재 여러 효소제나 미생물농약 등이 발명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것들은 최대한 이용하여 생산성의 안정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5) 생명농업의 올바른 전개를 위해서는 지역농업의 조직화가 필요하다. 개별농가단위의 상업적 전업농을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농업형태는 끊임없이 지력을 약탈하는 반생명적 농법의 근원이다. 지역농업은 지역내에 완결적 농업생산 및 순환 구조를 가지는 지역생활공동체를 지향한다. 따라서 생명농업은 생산공동체(생산조직)를 기본단위로 하는 지역농업의 전개를 위한 핵심적 요소가 된다. 가톨릭농민회는 생명농업을 지향하는 ‘우리농 마을’을 건설하여 지역농업의 조직화를 추진한다.
(6) 생명농업은 순환과 공생의 새로운 농업형태를 지향한다. 이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생명농업은 생산공동체(분회, 우리농마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활공동체(본당 우리농생활공동체)와 함께 굳은 연대와 협동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 생명농업은 우리 신앙인들의 소명(召命)
제13회 농민주일 담화문(2008.7.20)
우리는 농업을 세계화를 표방하며 경제적 가치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모든 자연과 사물을 물질적인 가치로만 바라보려는 신자유주의 관점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성장과 경쟁의 관점에서 농업을 말하고 농촌을 개발과 이익의 대상으로 여기며 한반도 대운하 건설과 같은 무도한 시도를 꿈꾸기도 하지만, 신앙인들은 생명의 관점으로 농업과 농촌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 농업과 농촌이야말로 하늘과 땅과 물 그리고 자신의 노동으로 땅을 일구는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만드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또한 농업과 농촌, 농민이야말로 환경도 살리고 생명도 살리며, 문화와 전통을 지켜내는 주체입니다. 농민들은 이 생명의 터전을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가장 합당하게 일구어가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 우리 교회의 도·농공동체 운동인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은 얼굴 있는 농산물을 지향하는 도시 신자들과 농촌 신자 농민들의 ‘생명의 관계성’을 통한 먹을거리 나눔 운동입니다. 이러한 생명 농산물 나눔터는 생명 농업을 실천하는 농민들에게는 안정적인 생산을 보장할 수 있고,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에게는 도시와 농촌을 살리는 생명 공동체운동으로서 중요한 교회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생명을 선택한 농민들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가장 적합하게 동참하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 생명의 가치
제14회 농민주일 담화문(2009.7.19)
어두운 농촌 현실을 희망의 터전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농촌과 도시가 직거래 나눔을 통해 서로를 살리기 위한 생명의 가치를 나누는 데 있습니다. 생명의 가치는 나눌수록 풍요로워집니다. 농촌과 도시의 상생 관계를 더욱 유기적으로 발전시켜 어떠한 환경의 변화에도 농민들이 안정적인 생명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농민들은 안심하고 생명농사를 짓고, 도시의 소비자들은 다소 비싸더라도 생명농산물을 기꺼이 구매할 때 생명의 가치는 점점 커지고 농촌은 희망의 터전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농촌과 도시는 단지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적인 관계가 아니라 함께 생명의 가치를 공유하고 나누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 도시와 농촌의 신앙인들이 이처럼 한 형제가 되어 생명농산물을 나누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2. “생명농업”의 신앙적인 근거
농업은 “생명”과 관련이 있고, “생명”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농업”은 단순히 하나의 직업이나 인간 노동행위의 한 부분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며, ‘하느님의 창조사업 중 하나’이다. 그래서 농부는 “생명농업”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조하게 되는 숭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생명농업”이 어떻게 우리들의 신앙문제와 관련이 있는지 ‘농민사목특별교서’(2004.11.28)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농업·농촌․농민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분명한 의지를 더욱 확실하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토록 농촌현장에 관심을 가지신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농촌현장이 ‘생명’과 관련된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음식의 방법으로 내어주시면서 스스로 ‘생명의 빵’(요한 6,48)이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생명’은 곧 ‘영원한 생명’, 곧 우리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라고 하시면서 농부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이 땅에 오셨음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러 오셨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사람을 살리는 일’ 곧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고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생명을 위한 일’ 곧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이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죽음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는 일’ 곧 ‘생명을 위한 일’을 하느님 아버지의 일로 생각하고 계셨기에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어떤 처지에서든지 그 일을 결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10항)
-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엄청난 일에 인간의 동참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창세 1,27) 인간이기에 이 일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으며(「노동하는 인간」 25참조), 마침내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그 열매를 맛볼 수 있도록 축복까지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요한 15,5)이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초대된 사람들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포도나무라는 생명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농부의 일이 하느님의 생명을 일구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까지 깨우치시려는 깊은 뜻이 거기에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11항)
-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생명을 살리는’ 생명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생명의 편에 선다는 말입니다(마태 12,30 참조). 오늘날 산업 문명은 생명을 점점 더 소외시키고, 반인간적이며 반생명적인 문화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농약, 제초제, 화학 세제, 화학 첨가물, 프레온 가스, 유전자 조작 등을 통해 공기, 물, 땅, 음식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연 생태계마저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문화가 생명의 문화를 압도하는 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사회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 전 지구 차원의 생태계 영역에서 위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 제도적인 위기일 뿐만 아니라 지적, 윤리적, 정신적 위기이며 인류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규모의 긴박한 위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삶의 편리함이라는 명분으로 알게 모르게 생명을 소외시키고 죽이기까지 했던 죽음의 문화를 멀리 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문화를 창출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꺼이 가난과 불편을 감수하는 선택도 해야 할 것입니다. 친환경농업, 환경운동, 우리농촌살리기운동 등 갖가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일에 모든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12항)
- 이러한 의미에서 농촌교구인 우리 안동교구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몸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 믿고 따름으로써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 농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전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려 합니다. 농민들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직접 참여하여 생명의 양식을 기르고 가꾸는 생명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의 슬픔과 고뇌를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전한다.’는 말은 우리 교구가 모든 반생명적인 문화에 반대하고, 나아가 생명과 생태계를 살리려는 노력에까지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기꺼이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생명의 일꾼들인 농민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농사를 통해 인간 생명에 기여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고, 소비자들은 이렇게 생산된 농산물을 고마운 마음으로 적극 애용함으로써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농사가 지속 가능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농촌을 살리고, 농업이 인간 생명을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13항)
- 교회의 사명은 이 땅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외면할 수 없는 안동 교구는 우리교구의 근간이 되고 있는 가난한 농촌과 농민들 가운데서 그 사명을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지금 농민들은 농산물에 대한 전면적 수입개방 이라는 국제적 요구 앞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농민들 속에 들어가 희망을 심고 생명이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답게 생명을 가꾸고 지키며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노력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또한 생활공동체 운동을 통해 도․농간의 연대를 이루고 이를 통해 농업․농촌․농민을 살리는 일을 돕고자 합니다. 우리는 위기에 처한 농촌․농업 문제가 단지 농민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농업은 생명을 생산하는 생명 산업이고, 농민은 생명을 기르고 지키는 파수꾼이며, 농촌은 그 생명의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창조 사업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생명의 일꾼 농민에게 관심을 갖고 농업․농촌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부터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생명이신 하느님 편에 서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14항)
3. “생명농업” 다시 살리기
- 반성과 다짐
<2003년 제8회 농민주일을 맞아 서울 목동성당에서 안동교구 쌍호공소 공동체 회원들을 초청했는데, 자매결연의 증표로 가톨릭농민회 쌍호 분회에서 떡메를 두 개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한 나무를 가지고 떡메 두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농촌과 도시, 도시와 농촌 공동체 간의 우정관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떡메를 목동으로 가져가기 전날 밤, 한 이불을 덮어 공소안에서 재웠다고 합니다. 두 떡메는 하느님 앞에서 신혼 밤을 지낸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도시와 농촌, 농촌과 도시가 만나는 모범적인 사례로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농촌 생산자들을 만날 때도 도시 소비자들을 만날 때도 우리는 이렇게 만나야 한다고 자랑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두 공동체가 지금 별거 중에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본당 신부의 탓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도·농간의 교류와 만남에 관심이 없는 본당 신부가 오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쌍호와 목동 공동체뿐만 아니라 도·농간의 다른 공동체 관계에서도 같은 이유로 서로간의 교류와 만남이 두절되는 경우가 많은데 참으로 슬픈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많은 경우에 도·농 공동체간의 교류와 나눔에 있어서 본당 사목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접할 때마다 교회의 사목을 책임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고 용서도 청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회가 아직 농업·농촌·농민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떻든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일은 도·농간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의 기본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창립 선언문(1994.6.29)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시와 농촌의 생명·생활공동체운동만이 “함께 살고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창조질서를 보전하고 생명의 먹거리를 제대로 나누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이야말로 우리의 믿음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참 공동체”를 실천하고 지향하는 “믿는 이들의 삶의 자세”라고 고백합니다. 도시교회와 농촌교회는 “일용할 양식”을 중심에 놓고 참된 나눔과 형제적 연대를 구체화할 것입니다. 창조질서를 보전하기 위해 수많은 생활 공동체를 건설해 나갈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들의 공동체인 한국 천주교회는 도·공동체 활동과 창조질서보전 활동이라는 두 기둥을 축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회복음화에 정성을 기울일 것입니다.>
- “생명농업” 살리기 운동 전개
농업·농촌·농민을 살리기 위해서 농민들의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차례 확인하였습니다. 농촌과 도시,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원칙이 되었습니다. 농촌이 살아야 도시가 살 수 있고 도시가 살아야 농촌이 살 수 있다는 관계는 마치 뿌리(농촌)와 꽃(도시)의 관계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도시가 나무의 가지와 잎새라면 농촌은 그 뿌리와 줄기입니다. 농촌인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저 무성한 잎새와 화려한 꽃은 순식간에 생명을 잃고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1996년 7월 21일 제1회 농민주일 담화문 중에서) 도시와 농촌을 함께 살리는 농업은 “생명농업”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였습니다. “생명농업”만이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생명농업”을 다시 살리고 지속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지 교회는 일찍부터 도·농 공동체 운동을 구체적으로 제안했고 그 운둥을 지속적으로 실천해왔습니다. 이에 대해 제1회 농민주일 담화문(1996.7.21)은 이렇게 제안한 바 있습니다.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이 공동운명체란 사실을 자각하고 무엇보다 먼저 도시 소비자들이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 이를 위해서 우선 우리 본당을 중심으로 소비자 공동체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우리농 생협’ 등 소비자 공동체 조직의 핵심은 반공동체의 활성화에 있습니다. 이 반공동체가 우리농 생산자 공동체에서 생산한 건강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공동 구입하고, 함께 밥상을 마련하며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생활실천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공동체 실천 속에서만 비로소 우리의 믿음과 삶이 일치하고 살아 숨 쉬는 교회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농 생협’으로 대표되는 도시소비자 공동체 조직과 건강한 생산자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우리농 마을’간의 형제적 연대는 우리농 운동의 지향이며 그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생명농업의 올바른 전개와 확장을 위해서 지역농업의 조직화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지역교회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농촌교회는 생산공동체(분회, 우리농마을)로, 도시교회는 생활공동체(본당 우리농생활공동체)로 조직화하여 생명농업의 순환과 공생을 확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전형적으로 마을 중심으로 형성된 농촌의 공소 교회는 이미 우리농 마을이나 분회 조직 결성에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교회의 구역·반모임이 도시 생활공동체(우리농 생협) 조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도·농간의 교류와 연대는 기대 이상으로 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사목자의 관심과 참여입니다. 안동교구만 해도 공소 교회가 70여 개나 되는데 현재 우리농 마을(분회)은 11개에 지나지 않고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본당 숫자도 39개나 되는데 우리농 본당 직매장은 8개 본당에만 있는 실정입니다.(2014년 말 기준으로 전국에 792개의 공소와 1682개의 본당이 있다.) 그런데 안동교구 생명 공동체 운동(가톨릭농민회)의 자랑거리가 있다. 개신교 신자들도 생명농업 공동체 운동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성의 효선 분회(사과와 마늘), 안동의 온혜 분회(아이들 밀서리 체험 행사, 가농소 입식운동 등)가 모범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사 소개>
[가톨릭 뉴스 지금 여기, 2015.6.24]
효선 분회 두 농민에게 물었다. 언제가 가장 좋으냐고. 자신들의 생산물을 좋다고 말해줄 때, “아, 이게 어느 집 그 마늘이구나.”라며 인정받을 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냥 인정이 아니라 서로 믿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힘들 때는, 신념을 두고 현실 앞에서 갈등할 때다. “약 한 번만 치면 좋겠는데.” 농산물에 병이 왔을 때,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번민하는 순간이 가장 두렵고 어렵다.
“믿는다는 것이 우리 농민들에게는 가장 큰 보상입니다. 농산물에 깃들인 우리의 정성과 땀, 보이지 않는 그것까지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이 농사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때론 정성을 쏟고, 때로는 수없이 갈등하면서 키워낸 농산물이 누군가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전해지기를 바라고, 또 한편으로는 못난이 농산물을 찾는 이들이 정말 고맙습니다.”
도시생활공동체 회원들을 꼬박꼬박 ‘꽃님들’이라는 우리농 공식 별칭으로 부르는 박희태 부회장에게, 그동안 꽃님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사랑과 일치와 신뢰가 싹트게 하시고 농촌과 도시가 하나로 이어져 온 누리에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박희태 부회장이 좋아하는 ‘농민을 위한 기도’의 마지막 구절이다.
※ 안동 가톨릭농민회의 지역 활동 자랑 거리 하나!
안동시급식지원센터(2010. 11.23 준공) 운영으로 지역 아이들에게 친환경농산물을 공급하고 있다.(안동지역 50여 개교 공급) 그리고 농축산식품부 지정 식생활 교육기관으로 지역민 대상으로 바른 먹거리 교육를 실시하고 있다. 어린이 식생활 교육 교재로 ‘건강이와 환경이의 내 땅, 내 모 지킴 이야기’ 시리즈(10개) 발행 교육하고 있다. 안동 가톨릭농민회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 도·농간의 교류 확대
실제로 있었던 사실들을 중심으로 엮은 일화들을 모은 「연탄길」이라는 책에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한쪽 다리가 짧아서 불편한 신부가 건강한 신랑과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주례 앞에 서 있습니다. 신랑이 한쪽 발을 신부의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넣고는 신부의 짧은 다리 왼쪽 발을 자신의 발등으로 떠받치고 있습니다. 신랑은 중심을 잡으려고 신부보다 더 많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살겠다고 굳게 약속하는 신랑신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신랑의 친구가 신랑신부의 방안에서 조그마한 액자 속에 끼워진 분홍색 쪽지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신랑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차라리 내 다리를 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이철환, 「연탄길」, 222-224 참조)
농업과 농촌을 살리는 일은 농민들의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특히 “생명농업”은 도시생활자들의 도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사실을 지금까지 우리는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도시와 농촌, 농촌과 도시가 함께하지 않으면 “생명농업”은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위의 예화를 농촌과 도시, 농촌 생산자와 도시 생활자 사이의 지속적인 만남에 적용시켜 보고 싶습니다. 어느 쪽이 신랑이 되든지 신부가 되든지 평생 서로간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생명농업”을 함께 지켜나가기가 힘들 때 서로 돕고 의지하며 앞으로 나간다면 우리 농업과 농촌은 분명히 살아날 것입니다. 도시와 농촌, 농촌과 도시의 이런 만남을 누가 주선할 것인가? 저는 교회가 앞장서서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농간의 만남을 주선하고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배려하고 필요하다면 농촌과 도시 현장을 찾는 일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맺는 말
- 이제 우리 모두는 농촌․농업․농민을 살리는 것이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농사가 ‘생명을 위해 몸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하는 거룩한 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농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깨닫고 세상을 위해 애써왔지만, 지금 그들은 어려운 농촌현실에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 일어나 생명을 위해 일하는 기쁨과 희망을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돕고 그들을 위해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농민사목특별교서 24항)
이제 우리 모두 “생명농업”으로 농업·농촌·농민을 살리는 일에 함께 하기로 다짐하면서 ‘농민을 위한 기도’를 함께 바치겠습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
우주에 질서와 조화를 주시고
햇볕과 바람과 비를 주시어
온갖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섭리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농업이 경시되는 상황에서도
땀을 흘려 농사짓는 농민들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함께하고 있음을 깨달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농사일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날이 갈수록 생명이 죽어가고
공동체가 파괴되어 가는 오늘날에도
모든 이가 마음의 고향인 농촌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고
온갖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데 앞장서게 하소서.
그리하여 사랑과 일치와 신뢰가 싹트게 하시고
농촌과 도시가 하나로 이어져
온 누리에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