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소리 102호] 한국농업과 먹거리 위기 극복을 위한 대안의 패러다임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
이호중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연구기획팀장
1. 농업과 먹거리의 위기
지난 20여년간 유지되어 왔던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의 결과로 한국 농업농민농촌은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걸어 왔다. 1990년 약 43%에 달했던 식량자급률이 2013년 현재 23.1%로 급감하면서 국민이 소비하는 먹거리의 약 ¾을 해외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농가인구는 1990년 약 666만명에서 2013년 현재 285만명으로 절반이상 감소하였다. 농업구조조정으로 인해 농가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규모 가족농이 하향분해 되면서 절반 이상의 농민이 탈농하는 가운데, 남아 있는 농민층은 소수의 상층농과 다수의 중소농으로 분화되는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농가소득, 농가부채와 같은 실질적인 지표도 농업농민의 위기 실태를 반영하고 있다. 1990년 도시가구소득대비 농가소득은 97.2%로 큰 차이가 없었으나 2013년 현재 62.5%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같이 농촌지역을 지탱하고 있던 농업과 농민층이 몰락하면서 농촌지역도 빠르게 붕괴되었다. 농촌지역의 경제기반이 약화되고, 농촌인구가 감소하면서 전국 대부분의 농촌지역에서 공통적으로 공동화 현상이 발생하였고 빈곤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농촌인구의 초고령화 및 여성화 현상이 일반화되었으며, 대도시 지역의 절대빈곤율 6.6%에 비해 농촌지역의 절대빈곤율은 14.8%로 두 배 이상 더 높은 빈곤율을 기록하였다. 특히 농가인구의 빈곤율은 최근 약 20%에 달하고 있어, 다섯 농가 가운데 한 농가가 절대빈곤층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자유주의 개방농정과 농업 위기는 먹거리 위기로 이어졌고, 상호간에 악순환의 고리가 생겨 위기가 악화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과 배경에서 발생한 한국의 먹거리 위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세계 식량위기가 현실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둘째, 먹거리의 약 ¾을 세계 식량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먹거리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공급 기반도 매우 취약하다. 셋째, 취약한 생산․공급 기반 때문에 불안정한 기상변화가 농산물대란과 가격폭등의 발생 빈도 및 강도를 증가시켜 먹거리에 관한 국민들의 비용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넷째, 농산물대란과 가격폭등은 특히 저소득층, 빈곤층, 소외계층의 고통부담을 높여 먹거리의 양극화를 유발하고 건강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2. 대안의 패러다임 :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
세계 식량체계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 농업과 먹거리 체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주적 권리를 의미하는 식량주권은 종래의 소극적인 식량안보(food security)를 넘어 먹거리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결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으며, 먹거리에 대한 보편적인 기본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울러 먹거리에 대한 기본권은 개인과 가계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먹거리 소비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하며, 먹거리의 생산자인 농민의 기본권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이라는 대안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것이 먹거리 정책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책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
3. 농업정책의 방향전환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에 기초한 대안적인 먹거리 정책은 앞에서 언급한 현재의 농업 및 먹거리 위기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먹거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유엔 국제식량농업기구(UN/FAO), 유엔 인권이사회(UN/HRC) 등이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고, 국제적인 시민사회와 농민연대들이 핵심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식량주권(food sovereignty) 제도화를 실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 약 23% 수준의 식량자급률을 중장기적으로 50%까지 높여 국내의 안정적인 생산 공급 기반을 확대해야 하며, 세계 식량체계에 지배받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먹거리 영역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식량주권의 제도화는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함으로써 먹거리 양극화를 해소하고, 먹거리에 따른 건강과 안전의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의 질을 고르게 향상시킬 수 있다. 먹거리 기본권은 개인과 가계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로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주요 과제의 하나이다.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는 첫째,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세계 식량체계가 초래하는 먹거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안전한 먹거리를 국민에게 생산·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국제 곡물가격의 폭등과 애그플레이션(Agflation)으로 인한 먹거리의 가격폭등으로부터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먹거리의 양극화에 따른 건강과 빈곤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민의 보편적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먹거리의 생산자인 농민의 기본권 보장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농업과 먹거리 정책의 목표와 방향에 부합하도록 식량주권을 제도화하는 핵심과제로서 (가칭)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를 제안하고자 한다.
4. 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의 도입
(가칭)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란 기초 농산물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 가격안정, 저소득층 및 공공급식에 대한 지원 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포괄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고, 안전한 먹거리의 생산․공급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기초농산물의 안정적인 국내 생산․공급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식량자급률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농산물 가격과 농가소득을 보장하며, 저소득층 및 공공급식에 대한 기초농산물 지원 등과 같은 제도장치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책임이자 의무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생산자 농민이 안심하고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측면에서 농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과 직접 연계되어 있다.
<그림> (가칭)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의 기본 골격
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란 결국 국가의 책임 하에 기초농산물의 안정적인 공급체계를 구축하는 국가책임제도라 할 수 있다. 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를 구성하는 핵심 정책과제는 ①식량자급률 50% 목표 실현 ②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③먹거리 복지를 위한 기초농산물 지원 프로그램 등이다. 또한 위와 연계된 주요 정책과제로는 ①중소 가족농 중심의 협동체 육성 ②농지자원의 보전 ③지속가능한 생태농업 발전 ④먹거리 안전관리 체계 강화 ⑤한반도 공동 식량자급 확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