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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있는 그대로 살겠다.”김준한 (빈첸시오) 신부 (부산교구 우리농본부장)

가톨릭농민회 2013. 12. 10. 12:37

<농민의 소리 99호에 실렸던 부산 우리농 담당사제 "김준한"신부님의 글입니다.>
지금 밀양의 소식은 암담함이 그지없습니다. 말도 안되는 법으로 사람을 내팽겨치는 경찰, 그들은 누구를 위한 경찰입니까? 국민을 위함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경찰은 경찰이 아니라 용역이겠지요.
밀양의 고통에 함께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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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있는 그대로 살겠다.”
                                                                                                            김준한 (빈첸시오) 신부 (부산교구 우리농본부장)

11월 6일, 언양 직동마을 쌀 창고 앞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2013년 쌀 수매를 위한 검사와 함께 한 해 동안 유기농 쌀을 재배하시느라 쏟으신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열었습니다. 한 달 전 천주교 부산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 본부장으로 인사이동 와서 한 해의 결실을 목전에 두고 소박하나마 잔치를 벌이게 되니 이 직분으로 오게 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논에는 벼멸구 피해로 어르신들이 고생을 하시기도 했지만,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한 점에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누다 보니 가을걷이의 풍요로움이 모든 시름을 덮어버리는 시원함이 가득했습니다. 쌀 창고를 가득 채운 나락을 바라보며 이장님이 연말 총회에서는 한 잔 거하게 사셔야 한다는 이야기가 누구에게서도 부담 없이 오고가는 그 잔치의 자리가 바로 농민의 자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양 직동마을 산 너머 밀양 땅에서는 오늘도 송전탑 공사강행 현장에서 어르신들이 3천명의 경찰과 한국전력 직원에 맞서 노숙을 하며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더더구나 이 지긋지긋한 송전탑 싸움이 8년이나 지속되고 있고, 그 동안 어르신들은 당신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그 논과 밭을 떠나와 산을 오르시는 나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그 동안의 싸움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말 그대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전과의 직접적인 대화노력은 물론이거니와 집회와 시위, 한국전력 본사와 정부종합청사 앞 상경투쟁, 단식과 서명운동, 공사 현장에서의 물리적인 저지투쟁 등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매일매일 송전탑 싸움의 현장을 지켜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치열하게 싸워 오신 어르신들이지만 그분들도 어쩔 수 없는 농부인 것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서울 대한문 앞에서 보름을 넘겨가며 단식을 하던 한 농부는 자신이 땀 흘려 가꾸어 온 당근이며 양배추 등이 눈에 밟혀 단식 내내 힘들어하였고, 경찰의 표적수사로 밀양 구치소에 구속된 또 다른 한 농부는 면회 온 아내에게 하우스 설비며 나락 걱정을 하며 마음 불편해 하셨습니다.
다들 이놈의 싸움이 빨리 끝나 편하게 농사짓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며 사과를 쳐다만 보고 새벽잠을 이겨내 여명이 비춰오기도 전에 산길을 올라야 하는 끝임 없는 나날은 어르신들에게 한 마디로 지독한 고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45,000 볼트 송전탑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싸우시고 계신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어르신들은 송전탑 현장까지 중장비가 들어가기 위한 길을 내기 위해 벼가 심어진 논을 갈아 엎어버린 한전의 만행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집보내지나 말걸!" 이라고 되뇌시는 삼평리 어르신들의 말씀은 저로 하여금 이 싸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농작물을 그저 돈으로 보지 않고 땅에 심어지는 그 순간 자식처럼 여기고, 그렇게 생명을 얻어 자라가는 그 시발점부터 시집을 보낸 것이라는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풍요로운 생태적인 감수성 속에서 길러진 표현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왜 어르신들이 그 긴 세월을 두고도 포기하지 않고, 보상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끝까지 이 싸움을 해오고 계신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땅과 공동체에 대한 의식 자체가 도회지의 사람들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밀양시 단장면 동화마을 95번 송전탑 공사현장 저지투쟁 중 만난 한 어르신도 그러한 깨달음을 저에게 던져 주셨습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어릴 적 학교 구경도 못하고, 걸어서 2~3시간이 걸리는 깊은 산속에 가서 나물을 캐는 나날을 보내며 산과 자연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공사 현장에서 잠시 소강상태가 유지될 때 당신이 앉으신 자리를 360도 빙 돌아가며 자라고 있는 나무며 풀, 꽃의 이름과 속성을 줄줄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만한 숲해설가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전력과 정부는 신고리 3호기의 적기 시공 및 상업운전을 위하여 밀양에 반드시 765,000 볼트 송전탑을 세워야하겠다고 고집합니다. 이 공사는 국책사업으로 국민의 편의를 위해 도저히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제시한 지원방안이라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밀양시에 나노산업단지를 지어주고, 도로 확포장 공사를 국비로 지원하며, 재경밀양유학생 - 도대체 아직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 학생들을 유학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 을 위한 기숙사 건축비 138억 원을 지원하겠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경과지 어르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밀양 시내 사람들과 시골에 계신 분들을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만드는 지독하게 악질적인 지원책입니다. 그러다 보니 밀양시내에 걸린 플래카드 중에는 상공회의소와 산업단지 대표 명의로 '기업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아름다운 양보를 부탁합니다.'라는 노골적인 표현까지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업을 위하여 농민은 빈털터리로 퇴장하라는 이 무서운 표현이 당당하게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분노를 넘어서 망연자실하게 됩니다.
지중화, 우회송전, 노선변경 등의 전문적인 사항 등을 어르신들과 대책위 일꾼들이 발로 뛰고 준전문가 수준이 될 정도로 공부하여 한국전력에 객관적인 자료를 첨부하여 대안으로 제시해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검증을 받은 어르신들의 대안은 휴지조각처럼 던져버리면서 대도시에서는 이미 세웠던 송전탑도 뽑고 지중화하고 있다는 소식 앞에서는 한전도 정부도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765,000 볼트 송전탑이 세워진 강원도와 충청도의 현장을 답사했을 때 그곳 어르신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한다는 말씀은 그분들이 철탑이 들어선 후 겪은 재산권과 건강권 침해를 잘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때론 그 누군가가 말합니다. 어르신들이 외부세력에게 세뇌 당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어르신들은 어쩌면 대단히 보수적이십니다. 보수라는 것이 과거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현재의 상태를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입장이라면 어르신들은 참으로 지독한 보수주의자이십니다. 있는 그대로 살겠다, 아무 것도 안 해줘도 되니 그대로 두어 라라는 어르신들의 변함없는 말씀은 이 아름다운 산천과 농촌을 제발 더 이상 망치지 말고 지금 이 모습대로나마 보존하자는 간절한 소망이 묻어나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후손들을 위해 애쓰는 이 70~80대 어르신들은 곧 과거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과거의 인물이 미래의 후손을 위해 투쟁하는 그 자리에 현재의 인물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2013년 11월 8일